1MESSAGE
‹ 목차 목사와 복음 교역자에게 보내는 증언 검색

기관의 발전

1대총회 조직에 이어 제도상의 발전이 신속히 이루어졌다. 1865년 12월, 엘렌 G. 화잇에게 주어진 계시 속에서 의료 기관의 필요성이 보여졌고, 이에 응하여 지도자들은 1866년 9월, 배틀크릭에 소규모의 건강 기관을 설립하였다. 그 후로 십년이 지나지 않아 엘렌 G. 화잇의 펜으로부터는 학교가 필요하다는 기별이 흘러나왔다. 1874년에 배틀크릭 대학이 세워졌다. 이렇게 해서 배틀크릭에서 세 가지 주요 기관이 신속히 발전하게 되었으며,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들은 급성장하고 있는 교단의 중심지로 점점 더 많이 몰려들게 되었다. 사업에 경험이 있는 인물들이 기관의 사업을 돌보기 위해 초빙되었다. 사업적 관심이 팽창되고 발전되며, 사업이 번영함에 따라 이러한 인물 중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도의 기별보다는 자신의 사업적 수완을 더욱 신뢰하기에 이르렀다.

2십년도 되지 않아서 교단은 예언의 신의 원칙 위에 세워진 교육 프로그램과 세속적인 정책과 방법에 물든 인물들이 지도하는 세상의 교육 프로그램 사이의 이해 관계를 놓고 갈등을 겪게 되었다.

3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선구자들은 주로 자수 성가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헌신적이고, 재능과 기술이 뛰어난 인물들이었다. 그들의 책을 읽어보면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학문적 배경의 제한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매우 겸손한 편이었다. 1880년 초에 학위를 가진 어떤 교육가가 그들 속에 들어왔을 때, 그를 교육 사업의 지도적 위치로 떠받들어 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교리와 역사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면서도 크게 신임 받는 위치로 급격히 부상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는 자기에게 지워 준 책임을 위해 준비되지 못했다는 것을 드러내고 말았다.

4문제는 지극히 심각해져서 배틀크릭의 지도자들과 평신도들은 편이 갈라졌다. 어떤 이들은 학위를 가진 그 교육가의 지도력에 휩쓸리고 말았으며, 반면에 어떤 이들은 예언의 신의 권면 속에 제시된 것들을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로 대학과 그 일에 관여한 이들은 불행한 경험을 맛보게 되었다. 배틀크릭 대학은 1년간 문을 닫았다. 그들의 발언과 취한 입장은 적지 않은 지도자들과 교인들에게 그 흔적을 남겼다.

5바로 이 기간에 교회증언 5권, 20-105쪽의 기별이 출판되었다. 처음에 그것은 배틀크릭 교회를 위한 증언이란 이름으로 된 소책자였다. 이 소책자는 후에 제5권 속에 재발행된 내용뿐 아니라 배틀크릭의 인물들과 상황들에 관한 좀더 개인적인 언급들을 담고 있었다. 그 당시의 분위기를 알려면 표제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족할 것이다. 두번째 장, “우리 대학”은 “교과서로서의 성경”, “대학의 목적”과 “대학의 교사들”이라는 소제목을 갖고 있다. 그 다음 장들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부모로서의 훈련”, “중요한 증언”, “무시된 증언들”, “우리 대학의 교역자들”, “정죄받는 시기심과 헐뜯음”.

6당시는 어려운 때였으며, 엘렌 G. 화잇은 다음해에 배틀크릭에서 열린 1883년 대총회 회기에 참석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 아래 일련의 아침 예배를 통해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 목사들에게 실제적인 노선에 관해 충고하였다. 의미 심장하게도 그 중 하나가 “그리스도 우리의 의”였다[가려뽑은 기별 1권, 350-354쪽(영문) 참조]. 이러한 역사적 환경이 본서에서 발견되는 엘렌 G. 화잇 권면들의 배경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괄목할 만한 발전기였던 1880년대

71874년에 교회는 대학을 건축하고 있는 중임에도 불구하고 앤드루스(J. N. Andrews)를 유럽으로 파송했지만, 188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괄목할 만한 선교 발전과 기관 발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882년에 새로 두 개의 학교를 시작했는데, 하나는 캘리포니아 주의 힐즈버그(Healdsburg, California) 에서, 또 하나는 매사추세츠 주의 사우드 랭카스터(South Lancaster, Massachusetts)에서였다. 1885년, 스위스의 바젤(Basel, Switzerland)에 신축된 중앙출판소(Central Publishing House)에서 출판 사업이 시작되었다. 그 해에 교역자들이 오스트레일리아로 파송되어 멜버른(Melbourne)에 에코 출판소 (Echo Publishing Company)가 곧 세워졌다. 1885-1887년에 엘렌 G. 화잇은 유럽에 머무르면서 국가들을 방문하며 그 곳의 사업을 굳건히 하고 격려하였다.

8우리는 교단 역사의 발전에 있어서 어떤 면들을 회고해 볼 때, 의의 세력과 악의 세력 사이에 쟁투가 벌어졌었다는 사실을 점점 더 인식하게 된다. 등장한 교회는 이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진리를 지닌 예언상의 남은 교회였다. 대적은 사업을 무산시키기 위해 자기 세력 안에서 모든 힘을 기울였다.

1888년 미네아폴리스 대총회의 배경

9원수의 효과적인 수단 중 하나는 좋은 사람들을 이끌어 궁극적으로는 그들이 사랑하는 사업을 방해하는 입장을 취하도록 이끄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모습은 토의와 토론에 참석한 이들의 심령 속에 계발된 정신을 통해 볼 수 있었다. 사업과 관련된 이들의 체험 속에서도 이런 모습은 나타났다. 새로운 나라로 나간 선교사들의 체험 속에도 이것이 나타났는데, 그들은 사업에 대한 좁은 안목 때문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노선 속으로 전진하는 데 어려움을 느꼈다. 광범위한 선교 사업의 사소한 일까지도 배틀크릭 지도자들의 지도를 받으려는 어떤 이들의 경향 속에서도 이것을 볼 수 있었다. 막중한 기관 사업을 지고도 자신이 거의 알지 못하는 원방의 사업을 위해 상세한 지시를 내리려고 한 배틀크릭 지도자들의 모습이 이러했다.

10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는 1887년 말로 접어들면서 전세계 신자수 25,841명, 북미에 26개 합회와 1개 대회, 해외에 6개 대회를 갖게 되었다. 대총회 위원회는 7인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위원회는 1882년에 3인에서 5인으로, 1886년에 5인에서 7인으로 조심스럽게 확대되었다. 사업상의 법적 문제를 돌보기 위해 5인의 이사회를 갖춘 대총회 협회(the General Conference Association)가 조직되었다. 다양한 사업 분야 때문에 “국제 안식일학교협회”, “건강과 절제협회”, “국제 소책자와 선교협회” 등 어느 정도 자율적인 기구들이 출범하게 되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1885년 중반기부터 1887년까지 엘렌 G. 화잇은 유럽에 가 있었다. 이제 그는 미국으로 돌아와 캘리포니아 주의 힐즈버그에 있는 자기 집에 거하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미시간 주 배틀크릭의 리뷰 앤드 헤랄드(the Review and Herald) 와 캘리포니아 주 오클랜드의 패시픽 프레스(the Pacific Press) 등 두 개의 출판소가 가동중이었다. 두 출판소 모두 상당량의 상업적인 일을 했는데 그것은 설비와 인원을 제대로 갖추어 교단의 인쇄물을 공급하는 데 필요한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두 곳 모두 주요 정기 간행물을 발행했는데, 배틀크릭에서는 리뷰 앤드 헤랄드가, 오클랜드에서는 사인즈 오브 더 타임즈(Signs of the Times)가 나왔다.

11이전의 1, 2년 동안 두 간행물은 갈라디아서의 율법에 관해 서로 다른 의견을 발표하였다. 두 간행물 편집인들은 상반되는 입장을 옹호하였다. 당시에 스위스에 주재하고 있던 엘렌 G. 화잇은 사인즈 오브 더 타임즈 편집인들에게 쟁점이 되는 기사들을 게재하지 말도록 권면하였다. 이 기별은 저술가와 편집인에게 보내는 권면(Counsels to Writers and Editors), 75-82 쪽에서 찾아볼 수 있다.

1888년의 대총회

121888년의 대총회 총회는 10월 17일부터 11월 4일까지 미네소타 주 미네아폴리스에서 개최되었다. 대총회가 열리기 전의 1 주일간 성경 연구회가 개최되었는데, 그 곳에서는 훈족 혹은 알레마니가 다니엘 2장과 7장, 그리고 요한계시록 13장의 열 나라 중에 포함되는가에 관해 토의하였다. 리뷰 앤드 헤랄드의 편집인 우라이아 스미스(Uriah Smith)와 사인즈 오브 더 타임즈의 편집인 존스(A. T. Jones)는 서로 다른 입장을 취했다. 패시픽 프레스의 와그너(E. J. Waggoner)는 속죄론과 하나님의 율법에 관해서, 존스 목사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관해서 성경 연구회를 인도하였다. 이상의 연구회는 대총회 회기 중에도 계속되었으며, 때때로 심각한 토론이 벌어졌다. 어떤 목사들은 진리를 연구하기보다는 특별한 문제들을 토론하기 위해 대총회에 참석했다. 엘렌 G. 화잇은 그 곳에 참석했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심령과 마음을 열고 이상의 연구에 참여하라고 호소했다. 그는 기도하면서 조심스럽게 논의되고 있는 주제들을 연구하라고 말했다.

13여하튼 문제들은 특정인과 동일시되기에 이르렀다. 많은 사람들의 심령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에 큰 감동을 받아 승리하는 그리스도인 생애를 개인적으로 체험하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조심스럽고 보수적인 배틀크릭 지도자들의 편에 가담하여 제시된 어떤 교훈들을 위험스럽게 여겼다. 대총회가 마쳤을 때 이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마련하신 축복을 얻지 못하고 말았다.

14당시에는 연설을 인쇄하는 관습이 없었기 때문에 엘렌 G. 화잇 외의 다른 사람들이 한 설교는 전혀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대총회 회보가 간행되었지만 그것은 대총회 행사 소식과 사업 보고를 담은 간단한 용지에 불과 하였다. 토의된 성경상의 문제들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다.

15그 총회에서 올슨(O. A. Olsen)이 대총회장으로 피택되었지만, 그는 대총회중에 유럽에 있었다. 1888년 11월 27일, 대총회 위원회의 위원인 윌리암 C. 화잇(William C. White)이 올슨 목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총회가 끝날 때 대표자들은 매우 다른 인상을 갖고 헤어졌다. 많은 사람들은 지금까지 참석했던 것 중 가장 유익한 집회 중 하나였다고 느꼈고,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열린 것 중 최악의 총회였다고 느꼈다.”

‹ 1 / 1 ›

기본 브라우저에서 열었습니다

이 창은 닫으셔도 됩니다.
열리지 않았다면 아래를 눌러 주세요.

1messag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