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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9장 6절

예언의 신에서 이 구절을 인용한 글 12곳입니다. 이사야 9:6 · 엘렌 G. 화잇 저서

부조와 선지자 2

PP 2:4 · 죄가 용납된 이유 우주의 통치자는 당신의 은혜로우신 사업을 홀로 행하지 않으셨다. 그분에게는 모든 존재들에게 행복을 주시려는 그분의 목적을 이해하고 당신의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동역자 곧 동료 한 분이 계셨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요 1:1, 2)다. 말씀이시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는 본성과 품성과 목적에 있어서 영원하신 아버지와 하나이셨으며 하나님의 모든 협의와 의도(意圖)에 참여하실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셨다.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사 9:6).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 5:2).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은 당신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선언하신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잠 8:22-30)다. PP 74:29 · 다윗의 만년*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32, 33).

시대의 소망 2

DA 2:20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그의 생애와 죽으심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이르러 온 파멸에서 회복하시는 것 이상의 일을 성취하셨다. 하나님과 사람을 영원히 분리시키려는 것이 사단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결코 타락하지 아니하였던 것보다 더욱 밀접하게 하나님과 연합된 것이다. 구주께서는 우리 인성을 취하심으로 결단코 끊어지지 않을 줄로 자신을 인간에게 붙들어 매셨다. 그는 영원한 시대를 통하여 우리와 연결되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신 것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속죄 제물로서 죽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는 아들을 타락한 인류에게 주셨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변치 않는 화평의 경륜(經綸)을 우리에게 보증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를 주시사 우리 인간 가족의 한 사람이 되게 하시되 그의 인성을 영원토록 보유하도록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성취시키시리라는 보증이다. “이는 한 아이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이 인성을 취하게 하시고 그 인성을 취하신 아들을 가장 높은 하늘로 옮기셨다. 우주의 보좌에 함께 앉으시는 분은 “인자”이시다. 그 이름이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고 불리우실 분은 바로 “인자”(사 9:6)이시다. 스스로 있는 자(I AM)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판결자(Daysman)가 되셔서 양 척 사이에 그의 손을 얹으실 분이시다(욥 9:33 참조).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히 7:26, 2:11)는 그는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 땅의 가족과 하늘의 가족이 연결되었다.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형제이시다. 하늘은 인성 속에 모셔지고 인성은 무한한 사랑의 하나님의 품안에 안기었다. DA 39:17 · “와서 잠간 쉬어라”*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오라고 분부하신다. 예수의 말씀에 유의한다면 우리는 더욱 강하고 더욱 유용하게 될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를 찾아서 그에게 모든 것을 낱낱이 고하였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용기와 교훈을 주셨다. 오늘날 우리가 시간을 내어 예수께 나아가 그에게 우리의 필요를 고한다면 우리는 실망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우리 오른편에 계시어 우리를 도와주시고자 하신다. 우리에게는 더욱 단순함과 우리 구주께 대한 신뢰와 확신이 더욱 필요하다. 그 이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불리워지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다고 기록된 그분은 훌륭한 모사(謀士)이시다. 우리는 그의 지혜를 구하라는 초청을 받고 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사 9:6; 약 1:5)신다.

각 시대의 대쟁투 1

GC 3:20 · 제1세기의 핍박 그렇다면 복음이 어떻게 평화의 기별이라고 불리울 수 있을까? 이사야는 메시야의 출생을 예언할 때에 그분을 “평강의 왕”(사 9:6)이라고 불렀다. 천사들이 예수님의 출생을 목자들에게 선포할 때에 베들레헴 상공에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라고 노래하였다. 이 예언적 말씀과 그리스도께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고 하신 말씀은 서로 배치되는 듯하다. 그러나 올바르게 이해하게 되면, 그 둘은 완전히 일치된다. 복음은 평화의 소식이다. 그리스도교는, 세상이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순종하기만 하면 세상에 평안과 조화와 행복을 전해주게 된다. 그리스도의 종교는 그 교훈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친한 형제의 관계를 이루어 준다.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해주고 상호간에 화목을 이루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대부분 그리스도의 대적인 사단의 지배를 받고 있다. 복음은 그들의 습관과 욕망과는 전혀 반대되는 생활 원칙을 제시해 주기 때문에, 그들은 복음을 반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죄를 드러내어 그것을 죄라고 지적해주는 순결을 증오하며 공의롭고 성결한 복음의 요구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인다. 그러므로 복음이 가져다 주는 고상한 진리가 증오와 분쟁을 일으키는 일도 있다는 의미에서 복음은 검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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